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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국 울릉도 우릉 무릉

언제나그기 2024. 3. 28. 14:38


삼국사기 고려사의  우산국/울릉도/ 우릉 또는 무릉

○ 고려사 > 권별 보기 > 志 > 지 권제12 > 지리3(地理 三) > 동계 > 울진현    

울진현
울진현(蔚珍縣)은 본래 고구려의 우진야현(于珍也縣)【고울이군(古亐伊郡)이라고도 한다.】으로, 신라 경덕왕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삼았다. 고려 때에 현(縣)으로 강등시켜 현령(縣令)을 두었다[置令].

울릉도(鬱陵島)【현(縣)의 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신라 때에 우산국(于山國)이라 불렀고, 무릉(武陵) 혹은 우릉(羽陵)이라고도 불렀으며 사방이 백리이다. 지증왕 12년(511)에 와서 항복하였다. 태조 13년(930)에 섬사람들이 백길사두(白吉士豆)를 보내 방물(方物)을 바쳤다. 의종 11년(1157)에 왕이 울릉의 땅이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옛날에 주현(州縣)이 있었고 백성이 거주할만하다고 들어 명주도감창(溟州道監倉) 김유립(金柔立)을 보내었는데, 가서 보고 와서 김유립이 아뢰기를, “섬 안에 큰 산이 있으며, 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향하면 바다까지 10,000여 보(步)이고, 서쪽으로 향하면 13,000여 보(步)이고, 남쪽으로 향하면 15,000여 보(步)이고, 북쪽으로 향하면 8,000여 보(步)입니다. 촌락의 흔적은 7군데이고 석불·철종·석탑이 있습니다. 시호(柴胡)·호본(蒿本)·석남초(石南草)가 많이 자라지만 바위가 많아 백성들이 살기에는 좋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그 논의가 이어지지 않았다. 일설에는 우산(于山)·무릉(武陵)이 본래 두 개의 섬으로 서로 멀지 않아 기후가 청명하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가 있다.

蔚珍縣本高句麗于珍也縣【一云古亏伊郡】, 新羅景德王, 改今名, 爲郡. 高麗, 降爲縣, 置令. 有鬱陵島【在縣正東海中. 新羅時, 稱于山國, 一云武陵, 一云羽陵, 地方百里. 智證王十二年, 來降. 太祖十三年, 其島人, 使白吉士豆, 獻方物. 毅宗十一年, 王聞, 鬱陵地廣土肥, 舊有州縣, 可以居民, 遣溟州道監倉金柔立, 往視, 柔立回奏云, “島中有大山, 從山頂, 向東行至海一萬余步, 向西行一萬三千余步, 向南行一萬五千余步, 向北行八千余步. 有村落基址七所, 有石佛·鐵鍾·石塔. 多生柴胡·蒿本·石南草, 然多岩石, 民不可居”. 遂寢其議. 一云, 于山·武陵, 本二島, 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Link :
https://db.history.go.kr/goryeo/level.do?levelId=kr_058r_0010_0030_0100&types=r


시호(柴胡)·호본(蒿本)·석남초(石南草)
석남초(石南草) : (+백제, 신라 일식위치)
○ 참고: https://www.yj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1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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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13
권 제4 신라본기 제4  >   지증(智證) 마립간(麻立干)  >   13년 6월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다(0512년 06월 (음))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다 ( 512년 06월(음) )

13년(512) 여름 6월에 우산국(于山國)(註 001)이 항복하여 복속하고 해마다 토산물[土宜]을 공물로 바쳤다.(註 002) 우산국은 명주(溟州)(註 003)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혹은 울릉도(鬱陵島)라고도 부른다. 땅은 사방 100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다. 이찬(伊飡)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軍主)(註 004)가 되어 이르기를, “우산국(于山國) 사람들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위력(威力)으로는 오게 하기 어렵지만, 꾀를 쓰면 굴복시킬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나무로 사자(師子) 모형을 많이 만들어(註 005)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러 거짓으로 알리기를,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곧 이 맹수를 풀어서 밟아 죽이겠다.”라고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몹시 두려워 곧바로 항복하였다.(註 006)

十三年, 夏六月, 于山國歸服, 歲以土宜(校勘 008)爲貢. 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 或名鬱陵島. 地方一百里, 恃嶮不服. 伊湌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謂, “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舩(校勘 009), 柢(校勘 010)其國海岸, 誑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踏殺之.” 國人恐懼則降.

Link :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04r_0020_0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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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 삼국유사』권1, 「기이」2 지철로왕

권 제1  >   제1 기이(紀異第一)  >   지철로왕(智哲老王)  >   박이종이 나무 사자를 만들어 울릉도를 복속시키다

또 아슬라주(阿瑟羅州)(註 560) 지금의 명주(溟州)(註 561)의 동쪽 바다 가운데에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거리에 울릉도(亐陵島) 지금은 우릉(羽陵)이라 한다(註 562)가 있었다. 둘레가 2만 6천 7백 30보였는데 섬사람[島夷]들은 그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여 신하되기를 거부하였다. 왕은 이찬(伊飡)(註 563)박이종(朴伊宗)(註 564)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박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 위에 일렬로 세워 놓고 그들을 위협하며 말하기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풀어 놓겠다.” 하자 섬사람들은 두려워 항복하였다. [왕은] 이종에게 상을 내려 주백(州伯:주의 장관)(註 565)으로 삼았다.

又阿瑟羅州 仐溟州東海中便風二日程有亐陵島 今作羽陵.. 周迴二万六千七百三十歩, 島夷恃其水深憍慠不臣. 王命伊喰朴伊宗将兵討之. 宗作木偶師子載於大艦之上, 威之云 “不降則放此獸.” 島夷畏而降. 賞伊宗爲州伯.

Link :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y_001r_0020_0290_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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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 고려사 > 왕대별 보기 > 현종(1009 - 1031) > 9년 > 11월 > 우산국에 농기구를 하사하다

1018년 11월 8일(음) 병인(丙寅) ,
1018년 12월 17일(양)

우산국에 농기구를 하사하다
우산국(于山國)이 동북여진(東北女眞)의 침략을 받아 농사일을 못하게 되자, 이원구(李元龜)를 보내 농기구를 하사하였다.

Link : https://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r&types=r#detail-kingYear/kr_004r_0110_0120_0030/8/1018/11


○ 고려사 > 왕대별 보기 > 현종(1009 - 1031) > 10년 > 7월 > 우산국 사람들을 돌려보내다

1019년 7월 24일(음) 기묘(己卯) ,
1019년 8월 27일(양)

우산국 사람들을 돌려보내다
기묘 우산국(于山國) 백성 중에 일찍이 여진(女眞)에게 노략질 당하여 도망쳐온 자들을 모두 돌아가게 하였다.

Link : https://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r&types=r#detail-kingYear/kr_004r_0120_0070_0050/8/1019/07


○ 고려사 > 왕대별 보기 > 현종(1009 - 1031) > 13년 > 7월 > 우산국 피난민을 호적에 편입하다

1022년 7월 8일(음) 병자(丙子) ,
1022년 8월 8일(양)

우산국 피난민을 호적에 편입하다
가을 7월 병자 도병마사(都兵馬使)가 아뢰기를, “우산국(于山國) 백성 중에 여진(女眞)에게 노략질 당하여 도망쳐온 자들을 예주(禮州)에 거주하게 하고, 관청에서 밑천과 양식을 제공하여 영원히 호적(戶籍)에 편입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 예주(禮州) : 경상북도 영덕 지역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8024


(※ 지금의 울릉도에 노략질 할 것이 무엇이 있었길래      
지금도 가기 힘든 울릉도에 여진이 위험을 무릅쓰고 배를 타고 가서 노략질을 했을까? )

Link : https://db.history.go.kr/goryeo/level.do?levelId=kr_004r_0150_0070_0010&types=r


○ 고려사 > 卷十八 > 世家 卷第十八 > 의종(毅宗) 11年 > 5월 > 우릉도에 김유립을 보내 거주 가능성을 살피게 하다

1157년 5월 12일(음) 병자(丙子) ,
1157년 6월 20일(양)

우릉도에 김유립을 보내 거주 가능성을 살피게 하다

왕이 동해(東海) 가운데 우릉도(羽陵島)라는 섬이 있는데, 땅이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옛날 주현(州縣)이 설치된 바 있어 사람이 거주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명주도감창 전중내급사(溟州道監倉 殿中內給事) 김유립(金柔立)으로 하여금 가서 시찰하게 하였다. 김유립이 돌아와 아뢰기를, “섬에는 암석이 많아 백성들이 거주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마침내 그 의논을 멈추었다.

Link : https://db.history.go.kr/goryeo/level.do?levelId=kr_018r_0050_0050_0050&types=r


○ 고려사 > 왕대별 보기 > 원종(1259 - 1274) > 14년 > 2월 > 원에 울릉도 벌목 중지 등을 건의하니 황제가 허락하다

1273년 2월 30일(음) 계축(癸丑) ,
1273년 3월 20일(양)

원에 울릉도 벌목 중지 등을 건의하니 황제가 허락하다

왕이 울릉도(蔚陵島)에서 벌목하는 것을 중단해줄 것, 홍차구(洪茶丘) 휘하 500인의 의복 공급을 덜어줄 것, 삼별초(三別抄)를 평정한 뒤 제주(濟州) 사람들을 육지로 나오게 하지 말고 그대로 생업에 안착시켜 줄 것 등을 주청(奏請)하자, 원(元) 황제가 모두 허락하였다.

(※ 지금의 울릉도까지 가서 벌목했다???)

Link : https://db.history.go.kr/goryeo/level.do?levelId=kr_027r_0030_0020_0120&types=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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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를 통해서 울릉도에 대해 알 수 있는 것.

➥ 둘레가 사방100리 또는 2만6천7백30보이다.
➥ 섬 안에 큰 산이 있으며, 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향하면 바다까지 10,000여 보(步)이고,
서쪽으로 향하면 13,000여 보(步)이고,
남쪽으로 향하면 15,000여 보(步)이고,
북쪽으로 향하면 8,000여 보(步)이다.
➥ 석불·철종·석탑이 있다.
➥ 시호(柴胡)·호본(蒿本)·석남초(石南草)가 많다.
➥ 바위가 많아 백성들이 살기에는 좋지 않다
일설에는 우산(于山)·무릉(武陵)이 본래 두 개의 섬으로 서로 멀지 않아 기후가 청명하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  울진현(蔚珍縣)의 동쪽바다 가운데, 또는 명주(溟州)의 동쪽바다 가운데에 순풍으로 이틀걸리는 거리에 있다.
➥ 동(북)여진 또는 여진이 자주 노략질 하였다.
➥ 고려 후기(말) 울릉도에서 벌목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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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찰 1. 벌목기록과 여진 노략질의 기록으로 볼 때,
지금의 울릉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현실성 타당성 합리성 등등 어느하나 이해되는 것이 없다.

※ 고찰2. 지리적관점에서 비교해 보자.
그래서 현재의 울릉도와 사서의 지리기록을 적용해 보면,

■ 현재 울릉도의 둘레
  • 둘레을 도는 도로 길이 44.55Km
  • 구글지도에서 측정한 길이 35Km
➥ 리(里)로  환산하면 대략 근접한다.

■ 성인봉에서 구글지도이용 동서남북측정거리 약.
  • 동으로 바다까지: 6.1Km
  • 서으로 바다까지: 5.8Km
  • 남으로 바다까지: 5.5Km
  • 북으로 바다까지: 3.8Km

➥ 보(步) 환산하면, (1보(步)=1.8m 적용) 약,
  • 동으로 바다까지: 6.1Km = 3400보 vs 10000보
  • 서으로 바다까지: 5.8Km = 3200보 vs 13000보
  • 남으로 바다까지: 5.5Km = 3050보 vs 15000보
  • 북으로 바다까지: 3.8Km = 2100보 vs 8000보

※ 1보(步)=1.2m 적용해도 큰 차이가 있다.

< 기록에 의한 동서남북 거리>

(기록에 의한 거리 표시)


<구글지도를 이용한 실제 측정거리>

(구글지도에서 측정한 거리)

※ 비교해 보면, 동서남북 비율도 거리도 맞지 않다.

○ 삼국 고려시대 보(步) 와 리(里)
• 1보 = 약 1.8m
※ 참고) 1보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 하고 1.2m  1.5m, 1.8m, 2.1m 등의 여러 주장 또는 해석들이 있으나 고려시대에는 보통 1.8m로 본다고 함.

• 1리 = 약 400m ~500m

※ 조선 이후 지금의 울릉도와 고려 및 심국시대 울릉도 우산국은 다른 지역임이 합리적인 해석이다.
지금의 울릉도는 조선에 와서 붙여진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