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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金海, 금해)의 지명과 위치 (금주(金州), 김해소경, 금관국, 대가야)

언제나그기 2024. 4. 4. 13:03

김해(金海)의 지명변천
• 삼국사기 (삼국시대): 금관국(金官國), 가락국(伽落國), 가야(伽耶),
  (신라) 금관군(金官郡), 금관소경( 金官小京), 김해경(金海京)/김해소경(金海小京)
• 삼국사기 (고려시대) : 김주(金州, 금주)

• 삼국유사(삼국시대) : 대가락(大駕), 가야국(伽耶國) (여섯 가야(伽耶)중의 하나),  금관경(金官京)
• 삼국유사 (고려시대) :  임해현(臨海縣), 임해군(臨海郡) 혹은 김해부(金海府).

• 고려사 (고려시대) :  김해부(金海府),  임해현(臨海縣), 금주안동도호부(金州安東都護府), 금주(金州),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 김녕현(金寧縣), 금주목(金州牧), 김해부(金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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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권 제34잡지 제3  지리(地理)一 신라(新羅)  
김해소경 ( 532년 )

김해소경(金海小京)(註 192)은 옛 금관국(金官國)(註 193)가락국(伽落國)이라고도 하고 가야(伽耶)라고도 한다.이다. 시조 수로왕(首露王)(註 194)으로부터 10대 구해왕(仇亥王)(註 195)에 이르러 양(梁)의 중대통(中大通)(註 196) 4년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19년(532)에 백성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여 그 땅을 금관군(金官郡)으로 삼았다.(註 197) 문무왕(文武王) 20년, 영륭(永隆)(註 198) 원년(680)에 소경(小京)으로 삼았다.(註 199)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김해경(金海京)으로 고쳤다. 지금[고려]의 김주(金州)(註 200)이다.

註) 192
김해소경(金海小京): 현재의 경상남도 김해시(金海市).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김해소경 혹은 김해경(金海京)으로 개명하였다. ...(후략)
• 지금의 김해시로 비정하고 있으나...

註) 193
금관국(金官國): 현재의 경상남도 김해시(金海市)에 있었던 소국(小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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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 사료 DB

잡지 제3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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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國遺事
권 제2  >   제2 기이(紀異第二)  >   가락국기(駕洛國記)  >   수로왕의 탄생과 육가야의 성립 설화(0042년 03월 (음))

가락국기(駕洛國記)(註 474)
[문종대(文宗代)(註 475) 대강(大康)(註 476) 연간에 금관(金官) 지주사(知州事)(註 477)의 문인(文人)이 지은 것으로 이제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1,000
...(중략)...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한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니 곧 여섯 가야(伽耶)(註 487)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國稱大駕洛又稱伽耶國, 即六伽耶之一也. 餘五人各歸為五伽耶主, 東以黄山江, 西南以濸海, 西北以地理山, 東北以伽耶山, 南而為國尾.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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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제2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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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유사 >  권 제2  > 제2 기이(紀異第二)  > 가락국기(駕洛國記)  > 가야 고지의 지명 변천

가락국이 망한 뒤로는 대대로 그 칭호가 한결같지 않았다. 신라 제31대 정명왕(政明王)(註 530)이 즉위한 개요(開耀) 원년 신사에는 금관경(金官京)이라 이름하고 태수(太守)를 두었다.(註 531) 그로부터 259년 후에 우리 태조(太祖)註 0-1가 통합한 뒤로는 대대로 임해현(臨海縣)이라 하고 배안사(排岸使)(註 532)를 둔 것이 48년이었으며, 다음에는 임해군(臨海郡) 혹은 김해부(金海府)라고 하고 도호부(都護府)를 둔 것이 27년이었으며, 또 방어사(防禦使)(註 533)를 둔 것이 64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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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제2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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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 > 卷五十七 > 志 卷第十一 > 地理 二 > 경상도 > 연혁

지(志) 권제11(卷第十一) 고려사57(高麗史五十七)

지리2(地理二)
경상도(慶尙道)는 삼한(三韓) 때에는 진한(辰韓)이었으며, 삼국(三國) 때에는 신라(新羅)이었다. 태조(太祖)가 신라와 후백제[百濟]를 병합하자, 동남도도부서사(東南道都部署使)를 두고 경주(慶州)에 관사(官司)를 설치하였다. 성종(成宗) 14년(995)에 경내(境內)를 나누어 10도(道)로 만들었는데, 상주(尙州)가 관할하던 지역은 영남도(嶺南道)로 삼았고, 경주금주(金州)가 관할하던 지역을 영동도(嶺東道)로 삼았으며, 진주(晉州)가 관할하던 지역을 산남도(山南道)로 삼았다. 예종(睿宗) 원년(1106)에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라고 불렀다. 명종(明宗) 원년(1171)에 경상주도(慶尙州道)와 진합주도(晉陜州道)의 두 도(道)로 나누었다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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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사료 DB

지 권제11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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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 권별보기 志 지 권제11  지리2(地理 二)  경상도  금주  연혁

금주(金州)는 본래 가락국(駕洛國)이다. 신라(新羅) 유리왕(儒理王) 18년(41)에 가락의 우두머리인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 등 아홉 명이 백성들을 데리고 계제사 잔치[禊飮]를 벌이다가,
....(생략)...
그 어린아이가 나날이 빼어나게 자라서, 십여 일 만에 키가 9척이 되었다. 그 달 보름날에 드디어 아홉 사람이 〈그를〉 받들어 군주로 삼았으니, 〈그가〉 바로 수로왕(首露王)이다. 나라이름[國號]를 가락(駕洛)이라 하였는데, 또 가야(伽倻)라고도 불렀으며,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는 황산강(黃山江)에 이르고, 동북쪽으로는 가야산(伽倻山)에 이르며, 서남쪽으로 큰 바다에 닿아 있고, 서북쪽으로는 지리산(智異山)이 경계를 이룬다.
[ 四境, 東至黃山江, 東北至伽倻山, 西南際大海, 西北界智異山. ]
▪︎ 삼국유사 기록
[ 東以黄山江, 西南以濸海, 西北以地理山, 東北以伽耶山, 南而為國尾.]

〈수로왕은〉 즉위한 지 158년 만에 죽었으며, 9대손 구해(仇亥)에 이르러 국가의 모든 재물과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수로왕 이후로 거등왕(居登王)·마품왕(麻品王)·거질미왕(居叱彌王)·이시품왕(伊尸品王)·좌지왕(坐知王)·취희왕(吹希王)·질지왕(銍知王)·겸지왕(鉗知王)을 거쳐 구해왕(仇亥王)【해(亥)는 『삼국유사(三國遺事)』「가락국기(駕洛國記)」에 충(衝)으로 적혀 있다.】에 이르기까지, 무릇 491년 동안 국가를 유지하였는데 신라 법흥왕(法興王)이 항복을 받은 뒤, 손님의 예[客禮]로써 대우하며 그 나라를 식읍(食邑)으로 삼았고, 금관군(金官郡)이라 불렀다. 문무왕(文武王) 때 금관소경(金官小京)을 두었다. 경덕왕(景德王) 때 김해소경(金海小京)이 되었다. 태조(太祖) 23년(940)에 주부군현(州府郡縣)의 이름을 고치면서, 김해부(金海府)가 되었고 뒤에 임해현(臨海縣)으로 강등하였으며, 또 승격시켜 군(郡)이 되었다. 성종(成宗) 14년(995)에 금주안동도호부(金州安東都護府)로 고쳤다. 현종(顯宗) 3년(1012)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원종(元宗) 11년(1270)에 방어사(防禦使) 김훤(金晅)이 밀성(密城)의 반란을 진압하고, 또 삼별초(三別抄)를 막는 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격시켜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가 되었다. 충렬왕(忠烈王) 19년(1293)에 현(縣)으로 강등되었다. 〈충렬왕〉 34년(1308)에 승격시켜 금주목(金州牧)이 되었다. 충선왕(忠宣王) 2년(1310)에 여러 목(牧)을 도태(淘汰)시키면서, 다시 김해부가 되었다. 수로왕묘(首露王墓)【고을의 서쪽에 있다.】, 초현대(招賢臺)【고을의 동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가락국의 거등왕이 이 대(臺)에 올라, 칠점산(七點山)의 참시(旵始) 선인(仙人)을 부르자, 참시가 배를 타고 왔다고 하여, 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가 있다. 또 【고을의 동쪽 황산강의 물이 빠르게 50여 리(里)를 흐르다가, 세 포구(浦口)에서 나뉘어 바다로 들어가므로, 민간에서는 삼차수(三叉水)라고 부르기도 한다.】가 있다. 속군(屬郡)이 2개, 속현(屬縣)이 3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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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사료 DB

금주(金州)는 본래 가락국(駕洛國)이다. 신라(新羅) 유리왕(儒理王) 18년(41)에 가락의 우두머리인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 등 아홉 명이 백성들을 데리고 계제사 잔치[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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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를 설명하는 기록

(삼국유사) 대가락(大駕洛), 가야국(伽耶國) :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

(고려사) 가락(駕洛), 가야(伽倻), 금관국(金官國) :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는 황산강(黃山江)에 이르고, 동북쪽으로는 가야산(伽倻山)에 이르며, 서남쪽으로 큰 바다에 닿아 있고, 서북쪽으로는 지리산(智異山)이 경계를 이룬다.

○ 가야(금관국)을 중심으로  그 사방 경계는
• 동쪽 황산강,
• 동북쪽 가야산(伽倻山),
• 서남쪽 큰 바다 (창해(滄海)),
• 서북쪽 지리산(地理山),  지리산(智異山)*
   *
조선시대 씌여진 고려사에서는 地理山智異山을 혼용하여 쓰고 있으나, 삼국사기는 구분하여 쓴 것으로 판단한다.
• 남쪽 나라의 끝.


사방경계에 대한 기록을 그림으로 나타내 보면,

가야(금관국) 사방경계도

지금의 한반도 김해(金海, 금해)를 기준으로 보면,

한반도 김해(金海)의 사방경계

■ 지금 한반도 김해(金海)의 사방 경계,
• 동쪽  강(황산강)
서북쪽 가야산.  동북쪽이 아님.
서쪽 지리산. 서북쪽이 아니라 서쪽. 지리산 地理山이 아니라 智異山.
• 서남쪽은 큰 섬. 큰 바다가 있다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 濸海는 일반명사 " 드넓은 바다" 일 수도, 고유명사 "濸海(창해)"일 수도....
• 남쪽 큰 바다. 나라의 끝으로 볼 수 있겠다.

◇ 지금의 김해가 삼국시대 가야(금관국), 고려 금주라 보기에는 지형이 맞지 않다.

◇ 가야는 어디에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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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해(滄海)

○ 삼국사기 > 권 제15고구려본기 제3 > 태조대왕(太祖大王) > 동옥저를 정벌하여 영토를 넓히다 ( 56년 07월 )

4년(56) 가을 7월에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영토를 넓혀 동쪽으로 창해(滄海)에 이르고 남쪽으로 살수(薩水)에 이르렀다.

○ 삼국사기 > 권 제37잡지 제6  > 지리(地理)四 고구려(高句麗)  > 평양성과 장안성 ( 427년 )

...(생략)  또한 수(隋) 양제(煬帝)註 048의 동방 정벌 조서에서 이르기를 “창해(滄海) 방면 군대는 선박이 천 리에 달하는데, 높직한 돛은 번개같이 나아가고, 커다란 군함은 구름처럼 날아 패강(浿江)을 횡단하여 멀리 평양(平壤)에 이르렀다.”라 하였으니,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