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

고려 개경 나성(羅城)

언제나그기 2024. 3. 2. 23:59

● 고려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

○ 고려사 > 권별 보기 > 志 > 지 권제10 > 지리1(地理 一) > 왕경 개성부 > 연혁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는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부소갑(扶蘇岬)이다. 신라(新羅)에서 송악군(松嶽郡)으로 고쳤다. 태조(太祖) 2년(919)에 송악(松嶽)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여 개주(開州)라 하고 궁궐을 창건하였다. 【회경전(會慶殿)은 뒤에 승경전(承慶殿)으로 고쳤다. 응건전(膺乾殿)은 봉원전(奉元殿)으로 고쳤다. 장령전(長齡殿)은 천령전(千齡殿)으로, 함경전(含慶殿)은 향복전(向福殿)으로, 건명전(乾明殿)은 저상전(儲祥殿)으로, 명경전(明慶殿)은 금명전(金明殿)으로, 건덕전(乾德殿)은 대관전(大觀殿)으로, 문덕전(文德殿)은 수문전(修文殿)으로, 연영전(延英殿)은 집현전(集賢殿)으로, 선정전(宣政殿)은 광인전(廣仁殿)으로, 선명전(宣明殿)은 목청전(穆淸殿)으로, 함원전(含元殿)은 정덕전(靜德殿)으로, 만수전(萬壽殿)은 영수전(永壽殿)으로, 중광전(重光殿)은 강안전(康安殿)으로, 연친전(宴親殿)은 목친전(睦親殿)으로, 오성전(五星殿)은 영헌전(靈憲殿)으로, 자화전(慈和殿)은 집희전(集禧殿)으로 고쳤다. 정양궁(正陽宮)은 서화전(書和殿)으로, 수춘궁(壽春宮)은 여정전(麗正殿)으로, 망운루(朢雲樓)는 관상루(觀祥樓)로, 의춘루(宜春樓)는 소휘루(韶暉樓)로 각각 고쳤다. 신봉문(神鳳門)은 의봉문(儀鳳門)으로, 춘덕문(春德門)은 체통문(棣通門)으로, 대초문(大初門)은 태정문(泰定門)으로, 창합문(閶闔門)은 운룡문(雲龍門)으로, 회일문(會日門)은 이빈문(利賓門)으로, 창덕문(昌德門)은 흥례문(興禮門)으로, 개경문(開慶門)은 황극문(皇極門)으로, 금마문(金馬門)은 연수문(延水門)으로, 천복문(天福門)은 자신문(紫宸門)으로, 통천문(通天門)은 영통문(永通門)으로, 경양문(景陽門)은 양화문(陽和門)으로, 안우문(安祐門)은 순우문(純祐門)으로, 좌우승천문(左右承天門)은 통가문(通嘉門)으로, 좌우선경문(左右宣慶門)은 부우문(敷祐門)으로, 좌우연우문(左右延祐門)은 봉명문(奉明門)으로, 연수문(延守門)은 교화문(敎化門)으로, 장녕문(長寧門)은 조인문(朝仁門)으로, 선화문(宣化門)은 통인문(通仁門)으로, 흥태문(興泰門)은 분방문(芬芳門)으로, 양춘문(陽春門)은 광양문(廣陽門)으로, 대평문(大平門)은 중화문(重化門)으로, 백복문(百福門)은 보화문(保化門)으로, 통경문(通慶門)은 성덕문(成德門)으로, 동화문(東化門)은 경도문(慶度門)으로, 서화문(西化門)은 향성문(向成門)으로, 대청문(大淸門)은 청태문(淸泰門)으로, 영안문(永安門)은 흥안문(興安門)으로 각각 고쳤다.】

시전(市廛)을 세우고, 방리(坊里)를 구분하여 5부(五部)를 나누었다.
광종(光宗) 11년(960)에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로 고쳤다. 성종(成宗) 6년(987)에 5부 방리(坊里)를 다시 정하였다. 〈성종〉 14년(995)에 개성부(開城府)가 되어, 적현(赤縣) 6개와 기현(畿縣) 7개를 관할하였다. 현종(顯宗) 9년(1018)에 부(府)를 없애고 현령(縣令)을 두어, 정주(貞州)·덕수(德水)·강음(江陰)의 세 현(縣)을 관할하고, 또 장단현령(長湍縣令)을 두어 송림(松林)·임진(臨津)·토산(兎山)·임강(臨江)·적성(積城)·파평(坡平)·마전(麻田)의 7개 현을 관할하게 하여, 모두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속시키고, 이를 경기(京畿)라 불렀다.
...(중략)

〈현종〉 20년(1029)에 경도(京都)의 나성(羅城)이 완성되었다【왕이 처음 즉위했을 때, 정부(丁夫) 304,400명을 징발해 쌓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사를 마쳤다. 성의 둘레가 29,700보(步)이고, 나각(羅閣)이 13,000칸이며, 대문(大門)이 4개, 중문(中門)이 8개, 소문(小門)이 13개로, 자안문(紫安門)·안화문(安和門)·성도문(成道門)·영창문(靈昌門)·안정문(安定門)·숭인문(崇仁門)·홍인문(弘仁門)·선기문(宣旗門)·덕산문(德山門)·장패문(長覇門)·덕풍문(德豐門)·영동문(永同門)·회빈문(會賓門)·선계문(仙溪門)·태안문(泰安門)·앵계문(鸎溪門)·선엄문(仙嚴門)·광덕문(光德門)·건복문(乾福門)·창신문(昌信門)·보태문(保泰門)·선의문(宣義門)·산예문(狻猊門)·영평문(永平門)·통덕문(通德門)이 그것이다. 또한 황성(皇城)은 2,600칸이고, 문이 20개인데, 광화문(廣化門)·통양문(通陽門)·주작문(朱雀門)·남훈문(南薰門)·안상문(安祥門)·귀인문(歸仁門)·영추문(迎秋門)·선의문(宣義門)·장평문(長平門)·통덕문(通德門)·건화문(乾化門)·금요문(金耀門)·태화문(泰和門)·상동문(上東門)·화평문(和平門)·조종문(朝宗門)·선인문(宣仁門)·청양문(靑陽門)·현무문(玄武門)·북소문(北小門)이 그것이다.
다른 기록[一云]에는, 정부(丁夫) 238,938명과 공장(工匠) 8,450명이 동원되었으며, 성의 둘레는 10,660보, 높이 27척(尺), 두께 12척, 행랑 건물[廊屋]이 4,910칸이라고도 한다.】.

(후략)...  

Link : https://db.history.go.kr/goryeo/level.do?levelId=kr_056r_0010_0020_0010&types=r

고려시대 史料 Database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는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부소갑(扶蘇岬)이다. 신라(新羅)에서 송악군(松嶽郡)으로 고쳤다. 태조(太祖) 2년(919)에 송악(松嶽)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여 개주(開州)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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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절요 권3 >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 현종(顯宗) 20년 > 8월 > 개경에 나성을 쌓다

개경에 나성을 쌓다
참지정사(參知政事) 이가도(李可道)와 좌복야(左僕射) 이응보(異膺甫), 어사대부(御史大夫) 황보유의(皇甫兪義), 상서좌승(尙書左丞) 황주량(黃周亮)에게 명하여 정부(丁夫) 238,938인과 장인 8,450인을 징발해서 개경(開京)에 나성(羅城)을 쌓도록 하였다. 이보다 앞서 평장사(平章事) 강감찬(姜邯贊)이 도읍[京都]에 성곽이 없다고 하여 이를 축성할 것을 청하니, 왕가도가 먼저 성터를 정하고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산을 들고 둘러서게 한 뒤 높은 곳에 올라가 그들을 나아가거나 물러나게 하며 면적을 고르게 하였다. 둘레는 10,660보이고 높이는 27척이었으며 낭옥(廊屋)은 4,910칸이었다.

Link : https://db.history.go.kr/goryeo/level.do?levelId=kj_003r_0010_0210_0090_0050&types=r

고려시대 史料 Database

○참지정사(參知政事) 이가도(李可道)와 좌복야(左僕射) 이응보(異膺甫), 어사대부(御史大夫) 황보유의(皇甫兪義), 상서좌승(尙書左丞) 황주량(黃周亮)에게 명하여 정부(丁夫) 238,938인과 장인 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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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송악군(松岳郡)
○ 三國史記권 제35 잡지 제4  >   지리(地理)二 신라(新羅)  >   송악군()

송악군

송악군(松岳郡)(註 190)은 본래 고구려(高句麗)(註 191)부소갑(扶蘇岬)이었는데 효소왕(孝昭王)(註 192) 3년(694)에 성을 쌓았으며 경덕왕(景德王)(註 193)이 그대로[송악군] 따랐다. 아태조[고려 왕건](註 194)가 개국(開國)하면서 왕기(王機)로 삼았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2개이다.
• 여비현(如羆縣)(註 195)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약두치현(若豆耻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송림현(松林縣)이다. 제4대 광종(光宗)(註 198)이 불일사(佛日寺)(註 199)를 그 땅에 창건하면서 그 현을 동북쪽에 옮겼다.
• 강음현(江陰縣)(註 200)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굴압현(屈押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註 195
지금의 경기도(京畿道) 장단군(長湍郡) 진서면(津西面) 불일리(佛日里)로 비정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8쪽).

註 200
지금의 황해도(黃海道) 금천군(金川郡) 서북면(西北面) 강음리(江陰里)로 비정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9쪽).

Link :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35r_0020_0210

한국 고대 사료 DB

잡지 제4 축소 좁게 확대 열기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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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부소갑(扶蘇岬)

○ 三國史記 권 제37 잡지 제6 >   지리(地理)四 고구려(高句麗)  >   한산주의 주·군·현·성()

한산주의 주·군·현·성

한산주(漢山州)(註 044), 국원성(國原城)(註 045) (미을성(未乙省)라고도 하고 탁장성(託長城)이라고도 한다.),
...(중략)...
매소홀현(買召忽縣)(註 073) (미추홀(彌鄒忽)이라고도 한다.),  부소갑(扶蘇岬)(註 110),
...(후략)

註 110
지금의 경기도 개성시(開城市) 일대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258쪽).


Link :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37r_0020_0050

한국 고대 사료 DB

한산주(漢山州), 국원성(國原城)[원주: 미을성(未乙省)라고도 하고 탁장성(託長城)이라고도 한다.], 남천현(南川縣)[원주: 남매(南買)라고도 한다.], 구성(駒城)[원주: 멸오(滅烏)라고도 한다.], 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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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기 계산해보기

○ 1보 = 1.8m로 볼 때, 고려 개경 나성둘레
29700보 = 약 53.5Km,
10660보 = 약 19.2 Km,
※ 자금성(내성) 둘레 : 4Km,
※ 경복궁 둘레 :  2.7Km,
※ 산서성 "치"형태를 갖춘 평요성 둘레 : 6.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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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 > 권별 보기 > 志 > 지 권제32 > 식화1(食貨 一) > 전제 > 경리 > 양전보수를 제정하다

양전보수를 제정하다

〈문종(文宗)〉 23년(1069)에 양전(量田)의 보수(步數)를 정하였다. 토지[田] 1결(結)은 방(方) 33보(步)【6촌(寸)을 1분(分)으로 하고, 10분을 1척(尺)으로 하며, 6척을 1보로 한다.】, 2결은 방 47보, 3결은 방 57보 3분, 4결은 방 66보, 5결은 방 73보 8분, 6결은 방 80보 8분, 7결은 방 87보 4분, 8결은 방 90보 7분, 9결은 방 99보, 10결은 방 104보 3분이다.

二十三年 定量田步數. 田一結, 方三十三六寸爲一分, 十分爲一尺, 六尺爲一步. 二結, 方四十七步, 三結, 方五十七步三分, 四結, 方六十六步, 五結, 方七十三步八分, 六結, 方八十步八分, 七結, 方八十七步四分, 八結, 方九十步七分, 九結, 方九十九步, 十結, 方一百四步三分.

Link : https://db.history.go.kr/goryeo/level.do?levelId=kr_078r_0010_0020_0020_0070&types=r

고려시대 사료 DB

〈문종(文宗)〉 23년(1069)에 양전(量田)의 보수(步數)를 정하였다. 토지[田] 1결(結)은 방(方) 33보(步)【6촌(寸)을 1분(分)으로 하고, 10분을 1척(尺)으로 하며, 6척을 1보로 한다.】, 2결은 방 47보, 3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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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보 =  약 1.2m 또는 1.5m 또는 1.8m 또는 2.1m

[참고자료]
• 1결에 대한 여러 해석: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14_0020_0050_0030_0040

1보  = 6척 (1척= 약 20cm) = 120cm
1보 = 6척 4촌 = 124cm
1보 = 6척 (1척 = 31.5~ 35cm) = 189~210cm
1보 = 5척 (1척 = 약 31cm) =  약 1.5m

• 보 (步)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180

1필 = 7보 = 42척 = 14.9m (1보= 2.12,m)

• 이 (里)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3458

이(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