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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대방(帶方) 남원(南原) 그리고 지리산

언제나그기 2025. 4. 19. 19:33

대방군(帶方郡)

[
대방의 위치 추정 ]
• 대방은 고구려가 공격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 대방은 백제의 건국 위치일 수 있고, 백제수도와 아주 밀접하다.
• 대방은 양평과 같은 방향에 위치해야 한다.
• 대방은 낙랑 옆에 있어야 한다.
• 대방은 후에 남원이지만 지금 한반도의 남원은 아니다.
• 대방(남원)에 용성이 있고 지리산이 있다.
• 대방과 순천(부)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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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 권 제37잡지 제6 > 웅진도독부 소속 주·현 > 대방주와 그 속현

대방주(帶方州)는 본래 죽군성(竹軍城)으로서 6현(縣). 지류현(至留縣)은 본래 지류(知留)이다. 


● 삼국사기 > 권 제23백제본기 제1 > 시조 온조왕(溫祚王) > 백제가 건국되고 온조왕이 즉위하다 ( 기원전 18년 )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가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다.
...(생략)...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는 모두 “동명(東明)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처음에 대방(帶方)의 옛 땅에서 나라를 세웠는데,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가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하였으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23r_0020_0010


 
▪︎북사(北史)  > 열전(列傳) > 백제(百濟) > 東明의 후손에 仇台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信義가 두터웠다.

○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信義)가 두터웠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帶方)에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는 딸을 [구태(仇台)에게]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東夷) 중에서 강국(强國)이 되었다. 당초에 백가(百家)가 건너 왔다(濟)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라고 불렀다.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jo_012r_0010_0020_0020



▪︎ 수서(隋書) > 동이열전(東夷列傳) > 백제(百濟) > 東明의 후손에 仇台라는 자가 있으니,

○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자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信義)가 두터웠다. [그가] 대방(帶方)의 옛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 한(漢)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東夷) 중에서 강국(强國)이 되었다. 당초에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너 왔다(濟)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라 불렀다.


●  삼국사기 > 권 제15고구려본기 제3 > 태조대왕(太祖大王) > 후한의 요동군 서안평현을 습격하다 ( 146년 08월 )

〔94년(146)〕 가을 8월에 왕이 장수를 보내 한의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현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잡아왔다.


○ 삼국사기 >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 고국양왕(故國壤王) > 요동군과 현도군을 점령하다 ( 385년 06월 )

2년(385) 여름 6월에 왕이 병력 40,000명을 내어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연의 왕 [모용]수가 대방왕(帶方王) [모용]좌(慕容佐)에게 명하여 용성(龍城)을 지키게 하였다. 모용좌는 아군이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것을 듣고 사마(司馬) 학경(郝景)을 보내 병력을 거느리고 구원하게 하였다. 아군이 공격하여 물리치고,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점령하고, 남녀 10,000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 삼국사기 > 권 제24백제본기 제2  > 책계왕(責稽王) > 대방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구원을 요청하다 ( 286년 )

〔원년(286)〕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에게 장가들어 부인으로 삼았으므로 말하기를, “대방과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이니 그 요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군사를 내어 구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그들이 쳐들어와 노략질할까 염려하여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며 대비하였다


○ 삼국사기 > 권 제25백제본기 제3  > 개로왕(蓋鹵王)  > 북위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전하다 ( 472년 )

18년(472) 위(魏)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알(朝謁)하고 표문(表文)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이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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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사사로이 임명한[私署] 관군장군(冠軍將軍) 부마도위(駙馬都尉) 불사후(弗斯侯) 장사(長史) 여례(餘禮)와 용양장군(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로 가는 길을 찾아 헤매며, 목숨을 자연의 운수에 맡겨서 만분의 일의 정성이라도 바치고자 하옵니다.
...(생략)...”


○ 삼국사기 > 권 제27백제본기 제5 > 위덕왕(威德王) > 제가 왕을 거기대장군으로 책봉하다 ( 570년 )

17년에 북제[高齊] 후주(後主)가 왕을 사지절(使持節) 시중(侍中)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대방군공(帶方郡公)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 위덕왕(威德王)  수에서 왕을 책봉하다 ( 581년 )

수(隋)나라의 고조가 조서를 내려 왕을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 대방군공(帶方郡公)으로 삼았다.


○ 삼국사기 > 권 제27백제본기 제5 > 무왕(武王) > 당에 대신을 보내 조공하다 ( 624년 01월 )
25년 봄 정월에 대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고조(高祖)가 그 성의를 가상히 여겨 사신을 보내 [왕을] 책봉하여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 삼국사기 > 권 제28백제본기 제6 > 의자왕(義慈王) > 의자왕의 즉위 ( 641년 03월 )

의자왕(義慈王)註 001은 무왕의 맏아들로서 ...(생략)...
〔당나라〕 태종이 사부낭중(祠部郎中) 정문표(鄭文表)를 보내 〔왕을〕 주국(柱國)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百濟王)으로 책봉하였다.


○ 삼국사기 > 권 제20고구려본기 제8  > 영양왕(嬰陽王) > 수양제가 조서를 반포하고 출정하다 ( 612년 01월 )

23년(612) 봄 정월 임오(壬午)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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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左) 12군(軍)은 누방(鏤方)․장잠(長岑)․명해(溟海)․개마(蓋馬) ․건안(建安) ․남소(南蘇)․요동(遼東)․현도(玄莬)․부여(扶餘)․조선(朝鮮)․옥저(沃沮)․낙랑(樂浪) 등의 길로 나아가고, 우(右) 12군은 점제(黏蟬)․함자(含資)․혼미(渾彌)․임둔(臨屯)․후성(候城)․제해(提奚)․답돈(踏頓)․숙신(肅愼)․갈석(碣石)․동이(東𦖮)註
대방(蔕方)․양평(襄平) 등의 길로 나아가되, 진군을 멈추지 않고 길을 인도하여 평양에 모두 집결하라.”라고 하였다. 모두 1,133,800명인데 2,000,000명이라고도 일컬었으며, 군량을 나르는 자는 그 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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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20r_0020_0220



○ 삼국사기 > 권 제43열전 제3 > 김유신전 부록 아들 [김]원술(元述) > 둘째 아들 김원술이 석문전투에서 살아 돌아오다(672년 08월)

이전에 법민왕(法敏王)이 고구려의 반란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여 지키고 있으니, 당 고종(高宗)이 크게 화를 내며 군대를 파견해 공격하였다. 당군이 말갈(靺鞨)과 함께 석문(石門)의 들판에 진영을 설치하자, 왕이 장군 의복(義福)과 춘장(春長) 등을 파견해 그들을 막게 하였고, 〔신라군은〕 대방(帶方)의 들판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 삼국유사 > 권 제1 > 제1 기이(紀異第一) > 남대방(南帶方) > 처음으로 남대방군을 두다

남대방(南帶方)
조조(曹)가 창건한 위(魏)나라 시대에 처음으로 남대방군(南帶方郡)[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이다.]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이라] 이른 것이다. 대방 남쪽 1천 리 바다를 한해(瀚海)라고 한다.[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황무지로써 대방군을 만들고 왜(倭)와 한(韓)이 여기 속하였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y_001r_0020_0090_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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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 > 권별보기 > 권57 > 志  > 지 권제11 > 지리2(地理 二)  > 전라도 > 남원부 > 연혁

남원부(南原府)는 본래 백제(百濟)의 고룡군(古龍郡)으로,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196~220)에 대방군(帶方郡)이 되었다. 조위(曹魏) 때는 남대방군(南帶方郡)이 되었다. 신라(新羅)가 백제를 병합하자, 당(唐) 고종(高宗)이 유인궤(劉仁軌)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로 삼았다. 신문왕(神文王) 4년(684)에 소경(小京)을 두었으며,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남원소경(南原小京)으로 고쳤다. 태조(太祖) 23년(940)에 부(府)로 고쳤다. 충선왕(忠宣王) 2년(1310)에 다시 대방군이 되었다가, 뒤에 남원군(南原郡)으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용성(龍城)이다. 지리산(智異山)【지리(地理)라고도 하고, 두류(頭流)라고도 하며, 방장(方丈)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남악(南嶽)으로 삼아 중사(中祀)에 올렸으며, 고려(高麗)에서 그대로 이어받았다.】이 있다.

https://db.history.go.kr/goryeo/level.do?levelId=kr_057r_0010_0020_0030_0010&types=r



○ 고려사 > 권별보기 > 권65 > 志 > 지 권제19 > 예7(禮 七) > 빈례  > 예종이 대방후 왕보에게 순천관에서 송 조서를 맞이하게 하다

일자. 1110년 06월 16일 (음)

계미 국왕이 대방후(帶方侯) 왕보(王俌)에게 명하여 순천관(順天舘)에 가서 조서를 맞이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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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방의 위치에 대한 대륙중국사서의 기록들]

출처 : http://www.prehistory.co.kr/investigation/stydy_daebang.htm

(1) 韓帶方之南 (삼국지권30)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다.)
(2) 倭人在帶方東南 (삼국지권30) (倭人은 대방의 동남에 있다)
倭人은 대방 남쪽, 회계, 담이(남월), 주애, 이주, 단주가 있는 곳에 있었다 (삼국지, 후한서, 남제서, 양사, 남사)
(3) 質桓之間復犯遼東西安平殺帶方令 (후한서권85) (질제와 환제 사이에 다시 요동 서안평을 침범하여 대방현령을 죽였다.)
(4) 桓靈之末韓濊彊盛郡縣不能制民多流入韓國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삼국지권30)
(환제와 영제의 말년에 한과 예가 강성해져서 그 군현을 제어할 수 없이되자 많은 백성들이 한국으로 도망해 들어 갔다.
건안시대에 공손강이 남쪽지방 거친땅을 쪼개서 대방군을 삼았다.)
(5) '남제서'에서 百濟는 요동에 廣陽, 朝鮮, 帶方, 廣陵, 淸河, 樂浪, 城陽등이 있다.
(北齊書에 城陽王 淸河王이 있는데 北齊는 550-577년까지 28년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