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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地理山) 과 지리산(智異山)

언제나그기 2025. 4. 19. 18:10

남쪽의 지리산(地理山) ,  지리산(智異山)  

地理山 o,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1회)
智異山 o, 삼국사기(1회), 삼국유사(1회), 고려사(거의 모두)
智理山 x,
知異山(진감선사탁비) [ 遂步至康州知異山 ]
地異山 x,

[地理山]
삼국사기  : 대부분
고려사1회 : 自地理山南, 至長城縣, 

[智異山]
삼국사기 1회 : 智異山雙溪寺
삼국유사 1회 :  同隐智異不復蹈世. 
고려사 : 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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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地理山)

삼국사기(三國史記) > 권 제10 신라본기 제10 > 흥덕왕(興德王) >  3년 12월 당에 갔던 사신이 차 종자를 가지고 돌아와 차가 성행하다(0828년 12월 (음))

〔3년(828)〕 겨울 12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당 문종(文宗)이 〔사신을〕 인덕전(麟德殿)으로 불러서 보고, 잔치를 열어주며 지위에 따라 차등을 두어 물품을 하사하였다.〔이때〕 당에 갔다 돌아온 사신인 대렴(大廉)이 차(茶)나무 종자를 가지고 왔는데, 왕이 그것을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여왕(善德女王)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행하였다.

Link :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10r_0060_0150


三國史記 > 권 제50 열전 제10  >   견훤(甄萱)  >   918년 왕건의 즉위를 축하하다(0918년 (음))

정명(貞明) 4년(918) 무인(戊寅)에 철원경의 여러 사람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즉위시켰다. 견훤이 이를 듣고 가을 8월에 일길찬(一吉湌) 민합(閔郃)을 보내어 축하하였다. 드디어〔후에〕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地理山)의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바쳤다.

貞明四秊戊寅, 鐡圎京衆心忽變, 推戴我太祖即位. 萱聞之, 秋八月, 遣一吉湌閔郤稱賀, 遂獻孔雀扇及地理山竹箭.

Link :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g&levelId=sg_050r_0030_0130&types=r


三國史記 > 권 제32 잡지 제1 >   제사(祭祀)  >   대·중·소사의 분류기준

3산(註 051)·5악(註 052) 이하의 명산과 대천을 나누어 대·중·소사로 삼았다.

註 051
신라에서 대사(大祀)의 대상으로 숭앙되었던 나력(奈歷), 골화(骨火), 혈례(穴禮)의 세 산(山).

註 052
신라에서 중사(中祀)의 대상으로 중시되었던 다섯 산(山), 즉 동악(東岳)=토함산(吐含山), 남악(南岳)=지리산(地理山), 서악(西岳)=용산(龍山), 북악(北岳)=태백산(太伯山), 중악(中岳)=부악(父岳(公山)).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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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 권 제32 잡지 제1 > 제사(祭祀) > 중사로 지내는 5악()

중사(中祀). 5악은 동쪽의 토함산(吐含山) 대성군(大城郡), 남쪽의 지리산(地理山) 청주(菁州)(註 062), 서쪽의 계룡산(雞龍山) 웅천주(熊川州), 북쪽의 태백산(太伯山) 나이군(奈已郡), 중앙의 부악(父岳) [공산(公山)이라고도 하는데, 압독군(押督郡)이다.]이다

中祀. 五岳, 東吐含山 大城郡, 南地理山 菁州, 西雞龍山 熊川州, 北太伯山 奈已郡, 中父岳 一云公山, 押督郡.

• 註 062 청주(菁州)  거타주(居陀州 (일명 居列州로 중심은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를 개편하여 지금의 진주를 중심으로 하여 설치하였다.  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6709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6734


• 청주(菁州) :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인데, 신라 문무왕 3년(663) 2월에 빼앗겨 신라 영토가 되었다. 이후 신문왕 5년(685)에 거열주를 뽑아내어 청주(菁州)를 설치하고 총관(摠管)을 두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jinju/toc/GC00400236


Link :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32r_0020_0150


三國史記 > 권 제32 잡지 제1  >   음악[樂]  >   거문고 음의 전수와 지금 전해지는 음과 곡

신라인 사찬(沙湌) 공영(𦷧永)의 아들 옥보고(玉寶高)가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50년 동안 금을 공부하였다. 스스로 새로운 가락 30곡을 지어 이를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하였고, 속명득은 이를 귀금선생(貴金先生)에게 전했고, 선생(貴金先生)도 역시 지리산(地理山)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신라 왕이 금의 도리가 단절될까 두려워하여, 이찬(伊湌) 윤흥(允興)에게 일러 방법을 찾아서 그 음(音)을 전수받도록 하면서, 마침내 남원(南原)의 공사(公事)를 맡겼다. 

....(생략)

Link :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32r_0030_0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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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遺事 > 권 제2  >   제2 기이(紀異第二)  >   가락국기(駕洛國記)  >   수로왕의 탄생과 육가야의 성립 설화(0042년 03월 (음))

가락국기(駕洛國記) 문종대(文宗代) 대강(大康) 연간에 금관(金官) 지주사(知州事)의 문인(文人)이 지은 것으로 이제 그것을 줄여서 싣는다.
....(생략)....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한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니 곧 여섯 가야(伽耶) 중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후략)

Link :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y_002r_0010_0230_0010


三國遺事 > 권 제5  >   제8 피은(避隐第八)  >   영재우적(永才遇賊 )  >   영재 스님이 도적을 감화시키다

영재우적(永才遇賊)

스님 영재(永才)는 성품이 익살스럽고, 재물에 연연하지 않고, 향가(鄕歌)를 잘 하였다. 나이 들어 남악(南岳)(註 311)에 은거하려 대현령(大峴嶺)에 이르렀는데, 도적 60여 사람을 만났다.

...(생략)

註 311
신라 5岳의 하나인 地理山으로 지금의 智異山이다.

Link :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y_005r_0030_0060_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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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 권별보기 > 권53 > 志 > 지 권제7  >오행1(五行 一) > 수  > 천둥번개 > 장성현에 천둥번개가 치다 (1131년 5월 미상(음))

〈인종〉 9년(1131) 5월 지리산(地理山) 남쪽에서 장성현(長城縣)에 이르기까지 종종 벼락이 떨어지고, 천둥 번개가 치고, 바람이 세게 불고, 큰 비가 내려 나무가 엎어지고, 벼이삭이 익지 못하였다.

Link : https://db.history.go.kr/goryeo/level.do?levelId=kr_053r_0010_0020_0130_0800&types=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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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智異山)

삼국사기(三國史記) > 권 제46 열전 제6 > 최치원(崔致逺) > 관직에서 물러나 자유롭게 노닐다

최치원은 서쪽에서 당(唐)을 섬길 때부터 동쪽으로 고국에 돌아와서도 모두 혼란한 세상을 만나 나아가지 못하고 어려움이 이어지고, 움직이면 번번이 비난을 받으니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하여 다시 관직에 나갈 뜻이 없었다. 유유자적하며 자유롭게 노닐어 산기슭과 강가나 바닷가에 정자와 누각을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었으며, 서적을 베개 삼아 풍월을 읊었다. 경주의 남산, 강주(剛州)의 빙산(氷山), 합주(陜州)의 청량사(淸涼寺),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 합포현(合浦縣)의 별장 같은 곳은 모두 〔최치원이〕 노닐던 곳이다.

致逺自西事大唐, 東歸故囯, 皆遭亂世, 屯邅蹇連, 動輙得咎, 自傷不偶, 無復仕進意. 逍遥自放, 山林之下·江海之濵. 營臺榭植松竹, 枕藉書史, 嘯詠風月. 若慶州南山·剛州氷山·陜州清涼寺·智異山雙溪寺·合浦縣别墅, 此皆遊焉之所.

Link :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46r_0030_0190


삼국유사 > 권 제5  > 제8 피은(避隐第八) > 영재우적(永才遇賊 )  > 영재 스님이 도적을 감화시키다

영재우적(永才遇賊)
스님 영재(永才)는 성품이 익살스럽고, 재물에 연연하지 않고, 향가(鄕歌)를 잘 하였다. 나이 들어 남악(南岳)에 은거하려 대
현령(大峴嶺)에 이르렀는데, 도적 60여 사람을 만났다. 
...(생략)...

도적이 그 말에 더 감동하여, 모두 칼을 풀고 창을 던지며, 머리를 깎고 [영재의] 무리가 되어, 지리산(智異)에 들어가 함께 숨어 다시는 세상을 밟지 않았다. 영재의 나이가 90에 가까운 원성대왕의 때였다.

賊又感其言, 皆釋釼投戈落髮爲徒, 同隐智異不復蹈世.


삼국유사(三國遺事) > 권 제2  >   제2 기이(紀異第二)  >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   후백제와 고려의 대립(0918년 (음))

정명(貞明) 4년 무인에 철원경(鐵原京)註 381의 민심이 졸지에 변하여 우리 태조(太祖)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견훤은 이 소식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서 경하(慶賀)하고 마침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智異山)의 죽전(竹箭) 등을 바쳤다.
¤ 지리산: (국역)智異山  (원문)地理山

.... (생략)

(원문) 貞明四年戊寅, 䥫原京衆心忽變, 推戴我太祖即位. 萱聞之遣使稱賀, 遂獻孔雀扇地理山竹箭等. 


Link :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y_002r_0010_0220_0040

※ 국문에서 원문의 한자를 바꾸어 썼다. 원문에서는 地理山 (지리산)으로 되어 있다. 원문의 [地理山] 을 사용해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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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 권별보기 > 권57 > 志  > 지 권제11 > 지리2(地理 二)  > 전라도 > 남원부 > 연혁

남원부(南原府)는 본래 백제(百濟)의 고룡군(古龍郡)으로,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196~220)에 대방군(帶方郡)이 되었다. 조위(曹魏) 때는 남대방군(南帶方郡)이 되었다. 신라(新羅)가 백제를 병합하자, 당(唐) 고종(高宗)이 유인궤(劉仁軌)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로 삼았다. 신문왕(神文王) 4년(684)에 소경(小京)을 두었으며,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남원소경(南原小京)으로 고쳤다. 태조(太祖) 23년(940)에 부(府)로 고쳤다. 충선왕(忠宣王) 2년(1310)에 다시 대방군이 되었다가, 뒤에 남원군(南原郡)으로 고쳤다. 공민왕(恭愍王) 9년(1360)에 승격시켜 부(府)가 되었다. 별호(別號)는 용성(龍城)이다. 지리산(智異山)【지리(地理)라고도 하고, 두류(頭流)라고도 하며, 방장(方丈)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남악(南嶽)으로 삼아 중사(中祀)에 올렸으며, 고려(高麗)에서 그대로 이어받았다.】이 있다. ...

https://db.history.go.kr/goryeo/level.do?levelId=kr_057r_0010_0020_0030_0010&types=r



○  고려사 > 권별 보기 > 世家 > 세가 권제1 > 태조(太祖) 3년 > 9월 > 견훤이 선물을 보내오다

920년 9월 13일(음) 신축(辛丑) ,  920년 10월 27일(양)

가을 9월 신축 견훤(甄萱)이 아찬(阿粲) 공달(功達)을 보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智異山)에서 나는 대나무 화살(竹箭)을 바쳤다.

秋九月 辛丑 甄萱遣阿粲功達, 獻孔雀扇·智異山竹箭.
(삼국사기의 같은 기록에서 지리산 한자를 바꾸었다.)

Link : https://db.history.go.kr/goryeo/level.do?levelId=kr_001r_0040_0020_0010&types=r

※ 고려사 : 조선전기 1392년에 시작하여 1395년 완성 후 1451년까지 57여년에 걸쳐 수정을 반복하여 편찬되었다.


고려사절요 > 高麗史節要 卷14 > 神宗靖孝大王 > 神宗 七年 > 12월 > 최충헌이 국정을 농단하다

1204년 12월 미상(음)

12월. 최충헌(崔忠獻)을 수태사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 어사대사(守太師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判兵部 御史臺事)로 삼았다. 왕은 최충헌이 옹립하는 데에 공이 있다 하여 신하의 예(禮)로 대우하지 않고, 늘 ‘은문상국(恩門相國)’이라 불렀다. 이때에 한유한(韓惟漢)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대대로 경도(京都)에 살다가 최충헌이 정치를 마음대로 하는 것을 보고는 말하기를, “변란이 장차 일어나겠구나.”라고 하였다. 마침내 처자식을 이끌고 지리산(智異山)에 숨었다. 조정에서 그를 불렀으나, 〈한유한은〉 나아가지 않기를 끝내 종신토록 하였다.

Link : https://db.history.go.kr/goryeo/level.do?levelId=kj_014r_0010_0080_0120_0010&types=r


□ 고려사절요 > 高麗史節要 卷30 > 辛禑一 > 禑王 三年 > 5월 > 이성계가 지리산 아래에서 왜구를 격퇴하다

이성계가 지리산 아래에서 왜구를 격퇴하다

(생략)....

우인열의 급보가 계속하여 이르자 태조는 날을 서둘러 가서 지리산(智異山) 아래에서 적과 더불어 싸웠는데,
...(후략)

Link : https://db.history.go.kr/goryeo/level.do?levelId=kj_030r_0010_0040_0050_0060&types=r


고려사절요 > 高麗史節要 卷31 > 辛禑二 > 禑王 六年 > 9월 >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격퇴하다  (1380년 9월 미상(음))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격퇴하다

우리 태조(太祖)가 변안열(邊安烈) 등과 함께 남원(南原)에 이르자... (중략)...

동쪽으로 운봉(雲峯)을 넘어 적과 수십 리 떨어져서 황산(荒山)의 서북쪽에 이르러 정산봉(鼎山峯)에 올랐다. 태조는 길 오른쪽의 험한 지름길을 보고 말하기를
...(중략)....

오직 70여 인만이 지리산(智異山)으로 달아났다. 태조가 말하기를,
...(후략)


Link : https://db.history.go.kr/goryeo/level.do?levelId=kj_031r_0010_0020_0090_0060&types=r


고려사절요 > 高麗史節要 卷31 > 辛禑二 > 禑王 七年 > 4월 > 이을진과 나공언이 무등산의 왜구를 격퇴하다 (1381년 4월 미상(음))

이을진과 나공언이 무등산의 왜구를 격퇴하다

왜구가 지리산(智異山)에서 나와 무등산(無等山)으로 숨어들어가서는 규봉사(圭峯寺) 바위 사이에 목책을 세웠는데, 3면이 절벽이고 오직 작은 길만이 벼랑을 따라 나있었으므로 겨우 한 사람만이 다닐 수 있었다. 전라도도순문사(全羅道都巡問使) 이을진(李乙珍)이 죽음을 무릅쓰겠다는 병사 100인을 모집하여 높은 곳에 올라 돌을 던지고 불화살을 쏘아 그 목책을 불사르니, 적이 궁지에 몰려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고 나머지 적은 바다로 달아나서 작은 배를 훔쳐 타고 도망쳤다. 전 소윤(少尹) 나공언(羅公彥)이 쾌선(快船)을 타고 추격하여 모두 죽이고 13인을 사로잡았다.

Link : https://db.history.go.kr/goryeo/level.do?levelId=kj_031r_0010_0030_0030_0030&types=r

※ 無等山(무등산)  광주광역시 북구와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및 담양군 남면에 걸쳐 있는 산.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8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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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한집(破閑集)

지리산(智異山)

파한집 > 권별 보기 > 파한집(破閑集) 권상(卷上) > 지리산(智異山)은 혹 이름을 두류(頭留)라고도 하는데

閑集 > 권별 보기 > 破閑集 卷上 > 智異山或名頭留, 始自北朝白頭山而起, 花峯蕚谷緜緜聯聯

※ 파한집 : 이인로의 사후 40년 뒤인 1260년(원종 1) 3월에 아들 세황(世黃)이 수집하고 안렴사(按廉使) 대원왕공(大原王公)의 후원으로 초간...

파한집(破閑集) 권상(卷上) > 지리산(智異山)은 혹 이름을 두류(頭留)라고도 하는데

지리산(智異山)은 혹 이름을 두류(頭留)라고도 하는데, 북조(北朝)의 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일어나 꽃 같은 봉오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가 끊임없이 이어져 대방군(帶方郡)에 이른다. 수천 리를 둘러 감아 엮였으니, 그 안에 10여 주(州)가 있고, 한 달을 둘러보아야 그 경계의 가장자리에 닿을 수 있다. 옛 노인들이 서로 전하여 이르기를, “그 사이에 청학동(靑鶴洞)이 있는데,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다니는 것이 겨우 통한다. 구부리고 엎드려서 몇 리 정도를 지나서야 텅 빈 곳이 나오는데, 사방이 모두 좋은 밭에 비옥한 땅이라 〈작물을〉 뿌리고 심기에 적절하다. 오직 푸른 학이 그 안에서 거처를 틀고 쉬므로, 이로써 그곳의 이름으로 하였다. 대개 옛날에 세속에서 숨은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과 구덩이가 여전히 가시나무가 뒤엉킨 옛터에 남아있다.”라고 하였다. 옛날에 내가 당형(堂兄) 최상국(崔相國)과 속세를 떠날 뜻[拂衣長往之意]이 있어, 이에 이 동을 찾자고 서로 약속하였다. 장차 〈짐을 넣은〉 대나무 바구니들을 송아지 두어 마리에 가득 싣고 들어가면 세속과 상관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내 화엄사(華嚴寺)로부터 화개현(花開縣)에 이르러 신흥사(神興寺)에서 쉬었는데 지나온 곳마다 신선이 사는 곳 같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천 개의 바위가 다투어 우뚝했고 만 개의 골짜기에서 〈강물이〉 다투어 흘렀다. 대나무 울타리와 초가집들이 있고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가 서로 근사하게 어울려 거의 인간 세상이 아닌 듯하였으나, 이른바 청학동이라는 곳은 결국 찾지 못하였다. 이에 시를 암석에 남겨 이르기를,

“두류산이 멀리 저녁 구름 아래에 있으니,
수많은 바위와 골짜기가 마치 회계(會稽)같구나,
지팡이를 짚으며 청학동을 찾고자 하나,

흰 원숭이 우는 소리만 숲 너머로 헛되이 들리는구나,
누대(樓臺)는 어렴풋이 보이는데 삼산(三山)은 멀고,
이끼 〈아래에〉 흐릿하게 네 글자가 적혔으니,

무릉도원[仙源]이 어디인가 짐짓 물어보지만,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은 사람들을 헤매게 하네.”
라고 하였다.

어제 서루(書樓)에서 우연히 『오류선생집(五柳先生集)』을 읽었는데, 「도원기(桃源記)」가 있어서 반복하여 보았다. 대개 진(秦)나라 사람들이 난세를 싫어하여 처자식을 이끌고 산과 물로 둘러쳐져 나무꾼[樵蘇]들도 이를 수 없는 깊숙하고 험준한 벽지를 찾아 살았다고 하였다. 진(晉)나라 태원(太元) 연간에 어부가 요행히 한 번 이르렀는데, 곧 그 길을 잊어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후세에 이를 채색하고 노래로 읊어 전하였으니, 도원은 선계(仙界)여서 신선들[羽車飇輪長生久視者]이 사는 곳이라고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대개 이 글[記]을 읽은 것이 미숙하기는 하나, 실로 청학동과 다르지 않다. 유자기(劉子驥)와 같은 고상한 선비가 있더라도 어찌 한 번 가서 찾을 수가 있겠는가.

Link : https://db.history.go.kr/goryeo/level.do?levelId=muph_001r_0150

※ 파한집(破閑集) 

고려시대 문신 이인로가 시평 · 서필담(書筆談) · 수필 · 시화 등 83편을 수록한 시화집. 시화 · 잡록집.

3권 1책. 목판본. 이 책은 저자가 69세로 사망하기 직전에 지은 것이다. 이인로의 사후 40년 뒤인 1260년(원종 1) 3월에 아들 세황(世黃)이 수집하고 안렴사(按廉使) 대원왕공(大原王公)의 후원으로 초간되었다. 현재 당시의 초간본은 전하지 않는다. 1659년(효종 10)에 엄정구(嚴鼎耉)가 경주부윤 재임 중에 조속(趙涑)의 가장비본(家藏秘本)을 가지고 각판(刻板)한 중간본이 남아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9630



■ 한국고대사료집성 중국편 > 景德傳燈錄 > 景德傳燈錄 卷第十二 > 懷讓禪師 第五世, 鎭州 臨濟 義玄禪師法嗣 二十二人

○ 懷讓禪師 第五世, 鎭州 臨濟 義玄禪師法嗣 二十二人
鄂州 灌谿 志閑禪師 …… 滄州 米倉和尙 已上一十六人 見錄·齊聳大師 …… 新羅國 智異山和尙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ko_060_0070_0020



ㅡㅡㅡㅡㅡㅡ화엄사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화엄사(華嚴寺) 

○ 三國遺事 > 권 제2 > 제2 기이(紀異第二) 원성대왕(元聖大王) 사미 묘정이 여의주를 얻어 많은 사랑...

권 제2  >   제2 기이(紀異第二)  >   원성대왕(元聖大王)  >   사미 묘정이 여의주를 얻어 많은 사랑을 받다가 당 황제에게 여의주를 빼앗기고 사랑도 잃다

왕이 하루는 황룡사, 주(注) 혹은 다른 본(本)에 따르면 화엄사(華嚴寺) 또는 금강사(金剛寺)라고도 하니 아마도 사찰 이름과 불경 이름이 혼동된 것인데, 여기의 승려 지해(智海)를 대궐로 불러 들여 50일 동안 화엄경(華嚴經)을 강연하게 했다.
.... (후략)

Link :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y_002r_0010_0090_0060


三國遺事 > 권 제4 > 제5 의해(義解第五) > 의상전교 (義湘傳敎 )  > 의상이 교를 전하다 (0668년 (음))

의상은 이에 열 곳의 절에 교를 전하게 하니 태백산의 부석사, 원주(原州)의 비마라사 (毗摩羅), 가야산(伽倻)의 해인사(海印), 비슬산(毗瑟)의 옥천사 (玉泉), 금정산(金井)의 범어사(梵魚), 남악(南嶽)의 화엄사(華嚴寺) 등이 그것이다.

Link :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y_004r_0010_0080_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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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異山

□ 한국고대금석문 > 통일신라 > 비문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원문 (887년)

....(생략)
[17] 長栢寺毉門多病來者如雲方丈雖寬物情自隘遂步至康州知異山有數於菟哮吼前導避危從坦不殊兪騎從者無所怖畏豢犬如也則與善无畏三藏結夏靈山猛獸前路深入

□ 금석문·문자자료 > 통일신라 > 비문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 국역문

자료명: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연대: 887년 (신라 정강왕 2)

(제액) 당해동고진감선사비(唐海東故眞鑑禪師碑)

유당(有唐) 신라국(新羅國) 고(故) 지리산(知異山)  쌍계사(雙谿寺) 교시(敎諡) 진감선사(眞鑒禪師)의 비명(碑銘)과 서(序)

....(생략)

Link :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gskh_005_0010_0320_0030. (국역)


□ 한국고대사료집성 중국편 > 全唐文 > 唐文拾遺 卷四十四 崔致遠 十一  > 有唐新羅國故知異山雙谿寺敎諡眞鑑禪師碑銘
有唐新羅國故知異山雙谿寺敎諡眞鑑禪師碑銘


□ 금석문·문자자료 > 통일신라 > 비문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자료명: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碑)
연대: 905년(신라 효공왕 9)

築于知異山知實寺覽諸章疏 ...(생략)... , 築于知異山知實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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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의 한자 표기 분석

[지리와 여러가지 한자표기들]
• 《주장, 설》: [智異]는 지리라는 우리말의 음사(音寫)일 뿐이며 지리는 산을 뜻하는 「두래」에서 나온 말인데, 두래는 (달)의 분음(分音)으로서 「두리」∙「두류」등으로 변음하여 「頭流」ㆍ「豆流」ㆍ「頭留」ㆍ「斗星」ㆍ「斗流」등으로 한자를 붙여 지명이 된 것이 많다. 
라고 주장 하는 논문(설)이 있다.

• 주요 한자 표기들:
  ¤ 地理山,  智異山,  智理山,  知異山,  地異山, 
  ¤ 智利  地利  地利  地而,
  ¤ 頭流, 豆流, 頭留, 斗星, 斗流

[사서에서]
地理山 삼국사기(대부분), 삼국유사, 고려사(1회)에 모두 보인다.
智異山 삼국사기 1회, 智異山雙溪寺.
                삼국유사 1회, 同隐智異不復蹈世.
                고려사에는 거의 대부분을 智異山으로 기록했다.
              
➡ 그 외의 지리산의 한자표기는 위의 사서들에 사용되지 않았다.
➡ 지리산(地理山)은 신라에서 중사(中祀)의 대상으로 중시되었던 다섯 산(山) 중에 남악(南岳=지리산(地理山) 이다. 智異山(x)

¤ 삼국사기에서 地理山과 智異山 은 다른 산이라고 본 듯 하다.
¤ 조선시대 씌여진 고려사는 地理山을 智異山으로 바꾸어 기록했다.
¤ 조선왕조에서 편찬한 고려사 : 1392년에 시작하여 1395년 완성.
    그 후 57년간 수정하고 또 수정하여 1451년(문종 1년) 최종적으로 편찬하였다.
¤ 삼국사기: 1136년 또는 1142년 시작 ~ 1145년(인종 23년) 완성. (9년 또는 3년 걸림)

[파한집에서]
• 파한집의 지리산(  ) 화엄사가 있는 것과 삼국유사의 남악의 화엄사로 기록한 것을 고려하면 파한집의 원문의 지리산의 힌자는 智異山 보다는 地理山이 아닐까.

[금석문에서]
• [知異山]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碑)
       통일신라  905년으로 추정되는 탑비.
       (篆額) 楞伽寶月塔記 (전액) 능가보월탑비
   于知異山知實寺覽諸章疏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통일신라 887년으로 추정되는 탑비
        有唐新羅國故知異山雙谿寺


[지리산의 위치]
• 고려사와 파한집의 기록으로 보면 대방군(帶方郡)의 진짜 위치를 찾으면 지리산의 진짜 위치를 알 수 있다.
• 백두산, 지리산은 대방군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지금의 지리산(智異山)은 고려이전의 지리산(地理山)이 될 수 없다.


[대방군(帶方郡) 위치]
• 삼국사기 대륙사서 등의 대방(帶方)에 대한 기록을 볼 때, 대방의 위치는 현재 한반도의 남원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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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군(帶方郡)

● 삼국사기 > 권 제23백제본기 제1 > 시조 온조왕(溫祚王) > 백제가 건국되고 온조왕이 즉위하다 ( 기원전 18년 )

...(생략)...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는 모두 “동명(東明)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처음에 대방(帶方)의 옛 땅에서 나라를 세웠는데,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가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하였으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23r_0020_0010


 
▪︎북사(北史)  > 열전(列傳) > 백제(百濟) > 東明의 후손에 仇台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信義가 두터웠다.
▪︎ 수서(隋書) > 동이열전(東夷列傳) > 백제(百濟) > 東明의 후손에 仇台라는 자가 있으니,

○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信義)가 두터웠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는 딸을 [구태(仇台)에게]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東夷) 중에서 강국(强國)이 되었다. 당초에 백가(百家)가 건너 왔다(濟)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라고 불렀다.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jo_012r_0010_0020_0020



●  삼국사기 >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 고국양왕(故國壤王) > 요동군과 현도군을 점령하다 ( 385년 06월 )

2년(385) 여름 6월에 왕이 병력 40,000명을 내어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연의 왕 [모용]수가 대방왕(帶方王) [모용]좌(慕容佐)에게 명하여 용성(龍城)을 지키게 하였다. 모용좌는 아군이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것을 듣고 사마(司馬) 학경(郝景)을 보내 병력을 거느리고 구원하게 하였다. 아군이 공격하여 물리치고,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점령하고, 남녀 10,000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 삼국사기 > 권 제24백제본기 제2  > 책계왕(責稽王) > 대방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구원을 요청하다 ( 286년 )

〔원년(286)〕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에게 장가들어 부인으로 삼았으므로 말하기를, “대방과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이니 그 요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군사를 내어 구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그들이 쳐들어와 노략질할까 염려하여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며 대비하였다


○ 삼국사기 > 권 제20고구려본기 제8  > 영양왕(嬰陽王) > 수양제가 조서를 반포하고 출정하다 ( 612년 01월 )

...(생략)...

좌(左) 12군(軍)은 누방(鏤方)․장잠(長岑)․명해(溟海)․개마(蓋馬) ․건안(建安) ․남소(南蘇)․요동(遼東)․현도(玄莬)․부여(扶餘)․조선(朝鮮)․옥저(沃沮)․낙랑(樂浪) 등의 길로 나아가고, 우(右) 12군은 점제(黏蟬)․함자(含資)․혼미(渾彌)․임둔(臨屯)․후성(候城)․제해(提奚)․답돈(踏頓)․숙신(肅愼)․갈석(碣石)․동이(東𦖮)․대방(蔕方)․양평(襄平) 등의 길로 나아가되, 진군을 멈추지 않고 길을 인도하여 평양에 모두 집결하라.”라고 하였다.
...(생략)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20r_0020_0220



● 삼국유사 > 권 제1 > 제1 기이(紀異第一) > 남대방(南帶方) > 처음으로 남대방군을 두다

남대방(南帶方)
조조(曹)가 창건한 위(魏)나라 시대에 처음으로 남대방군(南帶方郡)[지금의 남원부(南原府)이다.]을 두었기 때문에 [남대방이라] 이른 것이다. 대방남쪽 1천 리 바다를 한해(瀚海)라고 한다.[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마한 남쪽의 황무지로써 대방군을 만들고 왜(倭)와 한(韓)이 여기 속하였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y_001r_0020_0090_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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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 > 권별보기 > 권57 > 志  > 지 권제11 > 지리2(地理 二)  > 전라도 > 남원부 > 연혁

남원부(南原府)는 본래 백제(百濟)의 고룡군(古龍郡)으로,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196~220)에 대방군(帶方郡)이 되었다. 조위(曹魏) 때는 남대방군(南帶方郡)이 되었다.
...(생략)
충선왕(忠宣王) 2년(1310)에 다시 대방군이 되었다가, 뒤에 남원군(南原郡)으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용성(龍城)이다. 지리산(智異山)지리(地理)라고도 하고, 두류(頭流)라고도 하며, 방장(方丈)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남악(南嶽)으로 삼아 중사(中祀)에 올렸으며, 고려(高麗)에서 그대로 이어받았다.】이 있다.

https://db.history.go.kr/goryeo/level.do?levelId=kr_057r_0010_0020_0030_0010&types=r



○ 고려사 > 권별보기 > 권65 > 志 > 지 권제19 > 예7(禮 七) > 빈례  > 예종이 대방후 왕보에게 순천관에서 송 조서를 맞이하게 하다

일자. 1110년 06월 16일 (음)

계미 국왕이 대방후(帶方侯) 왕보(王俌)에게 명하여 순천관(順天舘)에 가서 조서를 맞이하도록 하였다. 


● [대방의 위치에 대한 대륙중국사서의 기록들]

출처 : http://www.prehistory.co.kr/investigation/stydy_daebang.htm

(1) 韓帶方之南 (삼국지권30)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다.)
(2) 倭人在帶方東南 (삼국지권30) (倭人은 대방의 동남에 있다)
倭人은 대방 남쪽, 회계, 담이(남월), 주애, 이주, 단주가 있는 곳에 있었다 (삼국지, 후한서, 남제서, 양사, 남사)
(3) 質桓之間復犯遼東西安平殺帶方令 (후한서권85) (질제와 환제 사이에 다시 요동 서안평을 침범하여 대방현령을 죽였다.)
(4) 桓靈之末韓濊彊盛郡縣不能制民多流入韓國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삼국지권30)
(환제와 영제의 말년에 한과 예가 강성해져서 그 군현을 제어할 수 없이되자 많은 백성들이 한국으로 도망해 들어 갔다.
건안시대에 공손강이 남쪽지방 거친땅을 쪼개서 대방군을 삼았다.)
(5) '남제서'에서 百濟는 요동에 廣陽, 朝鮮, 帶方, 廣陵, 淸河, 樂浪, 城陽등이 있다.
(北齊書에 城陽王 淸河王이 있는데 北齊는 550-577년까지 28년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