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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철령(鐵嶺), 철령위(鐵嶺衛)(1)

언제나그기 2024. 2. 5. 14:14

고려사에서의 철령(鐵嶺), 철령위(鐵嶺衛)
※ 철령(鐵嶺)은 지역(고개),  철령위(鐵嶺衛)는 명나라가 철령에 설치한 일종의 군사 기구( 위소(衛所),  치소(治所)...)

※ 철령, 철령위, 쌍성총관부의 위치는 한반도의 강원도가 아니다.


■ 고려사  철령(鐵嶺)

○ 고려사 > 卷二十四 > 世家 卷第二十四 > 高宗 42年 > 2월 > 등주별초가 철령에서 몽고군을 물리치다

1255년 2월 7일(음) 갑술(甲戌) ,
1255년 3월 16일(양)

등주별초가 철령에서 몽고군을 물리치다

몽고군이 철령(鐵嶺)에 진을 치고 유숙하였는데 등주별초(登州別抄)가 협공하여 섬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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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령(鐵嶺)과  등주(登州)는 가까이 있다고 본다.

○ 고려사 > 卷三十 > 世家 卷第三十 > 忠烈王 14年 > 5월 > 원 황제가 건주에 군량을 수송하는 일을 면제해주다

1288년 5월 28일(음) 임자(壬子) ,
1288년 6월 28일(양)

원 황제가 건주에 군량을 수송하는 일을 면제해주다

임자 오인영(吳仁永)이 원(元)에서 돌아왔다. 황제가 건주(建州)에 군량을 수송하는 것을 면제하고 정벌을 돕는 군대는 철령(鐵嶺)으로 옮겨 지키도록 하고, 국왕은 마땅히 본국(本國)에 남아서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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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주(建州)도 철령(鐵嶺)과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 고려사 > 卷三十 > 世家 卷第三十 > 忠烈王 17年 > 1월 > 카단 군사가 양근성을 함락하다

1291년 1월 20일(음) 기미(己未) ,
1291년 2월 20일(양)

카단 군사가 양근성을 함락하다
〈신묘〉 17년(1291) 봄 정월 기미 합단(哈丹, 카단)이 철령(鐵嶺)을 넘어 교주도(交州道)에 난입하여 양근성(楊根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辛卯)十七年 春正月 己未, 哈丹踰鐵嶺, 闌入交州道, 攻陷楊根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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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령(鐵嶺)을 넘으면 교주도(交州道)이다.

○ 고려사 고려사 > 권별 보기 > 志 > 지 권제12 > 지리3(地理 三) > 교주도

연혁

교주도(交州道)는 본래 맥(貊)의 땅으로 뒤에 고구려가 차지하였다. 신라를 거쳐 고려 성종 14년(995)에 영토를 나누어 10도(道)를 만들면서 춘주(春州) 등의 군현(郡縣)을 삭방도(朔方道)에 소속시켰다. 명종 8년(1178)에 처음으로 춘주도(春州道)라 불렀고 뒤에 동주도(東州道)라 불렀다. 원종 4년(1263)에 교주도(交州道)라 불렀다. 충숙왕 원년(1314)에 회양도(淮陽道)라 불렀다. 우왕 14년(1388)에 영동(嶺東)과 영서(嶺西)를 아울러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라 하고 충주(忠州)가 관할하던 평창군(平昌郡)을 내속(來屬)시켰다. 관할하는 군(郡)이 8개【방어군(防禦郡) 1, 지사군(知事郡) 2, 속군(屬郡) 5.】〈관할하는〉 현(縣)이 20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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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 > 卷五十八 > 志 卷第十二 > 地理 三 > 교주도 > 교주 > 연혁

연혁
교주(交州)는 본래 고구려의 각연성군(各連城郡)【각(各)은 객(客)으로도 쓴다. 가혜아(加兮牙)라고도 한다.】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연성군(連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이물성(伊勿城)이라 불렀다. 성종 14년(995)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어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 현종 9년(1018)에 방어사(防禦使)로 고쳤다. 충렬왕 34년(1308)에 철령구자(鐵嶺口子)가 적을 경비하는 데에[把截] 공(功)이 있어 회주목(淮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충선왕 2년(1310)에 여러 목(牧)을 정리하면서 회양부(淮陽府)로 강등하였다. 요충지[要害處]가 2곳으로 철령(鐵嶺)·추지령(楸池嶺)이다. 또 의관령(義館嶺)과 덕진명소(德津溟所)【사전(祀典)에 실려 있다.】가 있다. 속군(屬郡)이 2개이고 속현(屬縣)이 4개이다.

交州本高句麗各連城郡【各一作客. 一云加兮牙】, 新羅景德王, 改爲連城郡, 高麗初, 稱伊勿城. 成宗十四年, 更今名, 爲團練使. 顯宗九年, 改爲防禦使. 忠烈王三十四年, 以鐵嶺口子, 把截有功, 陞淮州牧. 忠宣王二年, 汰諸牧, 降爲淮陽府. 要害處二, 鐵嶺·楸池嶺. 又義館嶺, 德津溟所【載祀典】. 屬郡二, 縣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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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I kr_058r_0010_0010_0020_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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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령(鐵嶺)은 교주(交州)의 요충지 중 하나.
➥ 교주(交州)는 고구려의 각연성군(各連城郡)【각(各)은 객(客)으로도 쓴다. 가혜아(加兮牙)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연성군(連城郡), 고려 초에 이물성(伊勿城) 함), 고려 말 회주목(淮州牧), 회양부(淮陽府).


○ 고려사 > 권별 보기 > 志 > 지 권제12 > 지리3(地理 三) > 동계 > 연혁

연혁
동계(東界)는 본래 고구려의 옛 땅으로, 성종 14년(995)에 영토를 나누어 10도(道)로 할 때 화주(和州)·명주(溟州) 등의 군현(郡縣)으로 삭방도(朔方道)라 하였다. 정종 2년(1036)에 동계(東界)【북계(北界)와 더불어 양계(兩界)라 하였다.】라 불렀고, 문종 원년(1047)에 동북면(東北面)【혹 동면(東面)·동로(東路)·동북로(東北路)·동북계(東北界)라고도 불렀다.】이라 불렀다. 뒤에 함주(咸州) 이북지역은 동여진(東女眞)에 편입되었다. 예종 2년(1107)에 평장사(平章事) 윤관(尹瓘)이 원수(元帥)가 되어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쳐서 쫓아내고 9성(城)을 두었으며, 공험진(公嶮鎭)의 선춘령(先春嶺)에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다. 명종 8년(1178)에 이르러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 불렀다.
고종 45년(1258)에 몽고(蒙古) 병사가 침입하자 용진현(龍津縣) 사람 조휘(趙暉)·정주(定州) 사람 탁청(卓靑)이 반란을 일으켜 병마사(兵馬使) 신집평(愼執平)을 죽이고 화주(和州) 이북의 땅을 들어 몽고에 귀부하였다. 몽고는 이내 화주(和州)에 쌍성총관부(雙城惣管府)를 설치하였고, 조휘를 총관(摠管)으로 탁청을 천호(千戶)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고종〉46년(1259)에 충청도의 영월(寧越)·평창(平昌)을 〈동계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충청도로 되돌렸다. 원종 4년(1263)에 강릉도(江陵道)라 불렀다. 충렬왕 16년(1390)에 영월·평창을 다시 내속(來屬)시켰다.
공민왕 5년(1356)에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라 불렀다. 7월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유인우를 보내어 쌍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이때에 지도(地圖)를 순찰하여 화주(和州)·등주(登州)·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宜州) 및 선덕진(宣德鎭)·원흥진(元興鎭)·영인진(寧仁鎭)·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 등의 여러 성(城)을 수복하였다. 이전에 삭방도는 도련포(都連浦)를 경계로 삼아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정주·선덕진·원흥진에 설치한 세 관문(關門)이 원나라에 편입된 지 99년이 되었다. 이때에 비로소 수복하였다. 수춘군(壽春君) 이수산(李壽山)이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 강역(疆域)을 정하고 다시 동북면(東北面)이라 불렀다. 〈공민왕〉9년(1360)에는 삭방강릉도라 불렀다.
이로써 살펴보면, 철령(鐵嶺) 이북은 삭방도가 되고, 이남은 강릉도가 된다. 고려 때에 혹 삭방도, 혹 강릉도, 혹 합쳐서 삭방강릉도, 혹 강릉삭방도, 또는 연해명주도라 불렀다. 한 번 나누고 한 번 합침에 따라 비록 연혁과 명칭은 같지 않지만 고려 초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공험(公嶮) 이남에서 삼척(三陟) 이북은 통틀어 동계라 일컬었다. 관할하는 도호부(都護府)가 1개, 방어군(防禦郡)이 9개, 진(鎭)이 10개, 현(縣)이 25개이다. 예종 때에 설치한 것이 대도호부(大都護府) 1개, 방어군(防禦郡) 4개, 진(鎭) 6개이다. 공민왕 이후로 둔 것이 부(府) 2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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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계(東界)는 본래 고구려의 옛 땅으록, 삭방도, 동북면, 연해명주도, 강릉도, 삭방강릉도.
➥ 철령 이북은 삭방도, 이남은 강릉도(합쳐서 삭방강릉도  강릉삭방도 또는 연해명주도).
➥ 화주에 쌍성총관부.


○ 고려사 > 卷一百四 > 列傳 卷第十七 > 諸臣 > 김방경 > 김흔 > 김흔이 카이두의 침략을 물리치다

김흔이 카이두의 침략을 물리치다

〈충렬왕〉 15년(1289), 황제는 해도(海都, 카이두)의 군사가 변경을 침범하자 사신을 보내 징병(徵兵)하였는데, 왕은 김흔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요양(遼陽)에 가도록 하였다. 합단(哈丹, 카다안)이 오자 김흔은 환가현(豢猳縣) 경계에 주둔하면서 이에 대비하였다. 적이 장차 철령(鐵嶺)에 도착하자, 방수만호(防守萬戶) 정수기(鄭守琪)가 두려워 도망하여 돌아왔다. 고갯길이 매우 좁아 1명씩 가까스로 통할 수 있었으므로, 적은 말에서 내려 생선꿰미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당시 적은 굶주림이 심하였으나 정수기가 놓고 간 군량을 얻게 되자 수일간 크게 배를 채우고 북을 치며 전진하였는데, 고개를 넘어 교주도(交州道)로 난입하자 김흔도 달아나 피하니, 적은 마침내 양근성(楊根城)까지 무너뜨렸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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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 15년(1289), 황제는 해도(海都, 카이두)의 군사가 변경을 침범하자 사신을 보내 징병(徵兵)하였는데, 왕은 김흔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요양(遼陽)에 가도록 하였다. 합단(哈丹, 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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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양 가는 길 환가현, 가까운 곳에 철령.

○ 고려사 > 卷一百四 > 列傳 卷第十七 > 諸臣 > 원충갑

원충갑
원충갑(元冲甲)은 원주(原州) 사람으로 작은 체구지만 날쌔고 용감하였는데, 눈에는 전광(電光)이 있었으며 능히 어려움에 처해서는 몸을 잊었다. 향공진사(鄕貢進士)로서 원주별초(原州別抄)에 예속되었다. 충렬왕 때 합단(哈丹, 카다안) 적이 철령(鐵嶺)을 넘어 쳐들어오자,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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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충갑(元冲甲)은 원주(原州) 사람으로 작은 체구지만 날쌔고 용감하였는데, 눈에는 전광(電光)이 있었으며 능히 어려움에 처해서는 몸을 잊었다. 향공진사(鄕貢進士)로서 원주 별초(別抄)에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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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原州) 와 철령(鐵嶺)은 가깝다.


○ 고려사 > 卷一百十一 > 列傳 卷第二十四 > 諸臣 > 조돈 > 조돈이 쌍성총관부 수복에 공을 세우다

조돈이 쌍성총관부 수복에 공을 세우다
처음에 조휘(趙暉)가 쌍성(雙城) 등지로 반란을 일으켜 원(元)에 들어갔는데, 공민왕(恭愍王) 5년(1356)에 옛 땅을 수복하려고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고, 대호군(大護軍) 공천보(貢天甫)와 종부령(宗簿令) 김원봉(金元鳳)을 부사(副使)로 삼아 강릉도존무사(江陵道存撫使) 이인임(李仁任)과 함께 가서 이를 격퇴하게 하였다. 유인우가 군사를 거느리고 철령(鐵嶺)을 지나 등주(登州)에 이르자 쌍성과의 거리가 200여 리(里)였는데,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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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조휘(趙暉)가 쌍성(雙城) 등지로 반란을 일으켜 원(元)에 들어갔는데, 공민왕(恭愍王) 5년(1356)에 옛 땅을 수복하려고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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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령(鐵嶺)을 지나 등주(登州)....

○ 고려사 > 卷一百十三 > 列傳 卷第二十六 > 諸臣 > 최영 > 최영이 요동 공략을 위해 군대를 징발하다

최영이 요동 공략을 위해 군대를 징발하다
....(초략)...

이에 앞서 서북면도안무사(西北面都安撫使) 최원지(崔元沚)가 보고하기를,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승차(承差) 이사경(李思敬) 등을 보내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 방(榜)을 붙이기를, ‘호부(戶部)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철령(鐵嶺)의 이북(以北)·이동(以東)·이서(以西)는 본래 개원로(開原路)에 속해있었으므로 소속된 군인(軍人)으로 한인(漢人)·여진(女眞)·달달(達達)·고려(高麗)는 〈모두〉 그대로 요동에 귀속한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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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왕이〉 최영(崔瑩)의 집에 가서 말을 하사하니 최영이 안마(鞍馬)와 의대(衣襨)를 바쳤고, 그의 딸을 봉하여 영비(寧妃)로 삼았다. 신우(辛禑)가 일찍이 최영의 정직함을 꺼려 그의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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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령(鐵嶺)의 이북(以北)·이동(以東)·이서(以西)는 본래 개원로(開原路)에 속해.... 요동에 귀속한다.

○ 고려사 > 卷一百三十七 > 列傳 卷第五十 > 禑王 14年 > 2월 > 명 황제가 철령 이북 지역을 요동에 귀속시키라고 지시하다

1388년 2월 미상(음)

명 황제가 철령 이북 지역을 요동에 귀속시키라고 지시하다

....(초략)

철령(鐵嶺) 이북은 원래 원조(元朝)에 속했던 것이니, 아울러 요동(遼東)에 귀속시키겠다. 그 나머지 개원(開元)·심양(瀋陽)·신주(信州) 등지의 군민(軍民)은 원래의 생업에 복귀시키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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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령(鐵嶺)은 요동(遼東)에 있다.

( 철령과 쌍성총관부의 잘못된 위치비정으로 인한 기형적인 고려 경계 지도)

▲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정태만 교수가 밝혀낸 고려말 철령위 위치. (출처 : Korea History Times)

※ 철령의 위치 이외에 명주(溟州)에 대해...
◇ 고려사 : 성종 14년(995)에 영토를 나누어 10도(道)로 할 때 화주(和州)·명주(溟州) 등의 군현(郡縣)으로 삭방도(朔方道)라 하였다.
◇ 고려사 동계 연혁:
철령(鐵嶺) 이북은 삭방도가 되고, 이남은 강릉도가 된다.
➥ 따라서 명주(溟州)는 동계(동북면 , 삭방도, 강릉삭방도, 삭방강릉도, 또는 연해명주도라 불렸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지금의 강릉이 고려의 명주(溟州)인가?
➥ 고려의 명주(溟州) 찾으면 우산국 또는 울릉도를 찾을 수 있다.